게시판에 저를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군요. ^^;

제가 굳이 그 소동에 참여하여 게시판을 더 시끄럽게 만들 필요는 없을 듯 합니다.

세상에는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있는 법이고, 그러한 생각은 모두 존중되어야 합니다.

사실 시장에는 다양한 생각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생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시장은 정체될 것이고,

수익의 기회 또한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한가한 시간을 살려 저술활동에 열중해볼까 합니다.

현역에서 은퇴한 이 마당에 차트를 띄워놓고 케이스 토론을 하기는 어렵게 되었고,

대신 제가 오래 동안 생각했던 것들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습니다.

 

0. 역사의 중요성

 

인도의 초대 총리를 지낸 유명한 정치가 네루(PANDIT JAWAHARLAL NEHRU)는 옥중에서 그의 딸 인디라에게 서간문의 형식으로 세계의 역사를 가르칩니다. 훗날 인디라 간디 또한 인도의 총리가 됩니다. 이 편지들을 책으로 엮어 펴낸 것이 <세계 역사 이야기 GLIMPSES OF WORLD HISTORY>입니다.

 

네루는 역사를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 그의 딸에게 설파했으며 그의 방대한 역사지식을 흥미롭게 엮어냅니다.

 

인간이 세상에 대해 알아가는 방식에는 크게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일반적인 원칙으로부터 개별적인 사실들을 추론해내는 방법입니다. 수학과 물리학이 그러한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어떠어떠한 법칙의 형식으로 표현되는 모든 명제들은 개별 명제들을 추론해내는 디딤돌이 됩니다. 이를 연역적 추론(DEDUCTIVE REASONING)이라고 부르지여.

 

다른 하나는 개별적인 사실들을 모아 일반적인 원칙을 추론해내는 방법입니다. 이를 귀납적 추론(INDUCTIVE REASONING)이라고 하며, 수학과 물리학과 같은 엄밀한 과학 외의 자연과학이 이러한 추론을 토대로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하나는 학문의 역사상 가장 최근에 나타난 것인데, 통계적 추론(STATISTICAL REASONING)이 라고 합니다. 어떠한 대상을 이분법적으로만 기술할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질입니다. 너무도 다양한 변수가 개입되기에 깔끔하게 떨어지는 법칙으로 현상을 기술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통계학자들은 과거의 데이터를 모아 이들을 확률이라는 도구를 이용해 분석하여 결론을 이끌어냅니다. 이미 대부분의 사회과학에서는 통계적 접근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주식시장에 접근하는데 있어서 단연코 우리가 취해야 하는 방식은 통계적인 접근입니다.

주식에서는 '반드시'라는 말이 결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라는 우회적인 표현이 남발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입니다. 이는 주식시장의 복잡성을 감안한다면 어쩔 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일례로 애널리스트들이 경제 데이터를 분석하는데는 통계학이 빠지는 경우가 없습니다.

 

통계적 추론을 하기 위해서 절대 불가결한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거의 데이터입니다.

그리고 통계학의 특성상 표본의 크기가 크면 클수록 더 유의미한 결론이 도출됩니다. 이를 통계에서는 대수의 법칙(LAW OF LARGE NUMBERS)이라고 합니다.

 

이 말인 즉슨, 우리가 시장으로부터 어떠한 유의미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으려면 방대한 과거 데이터가 필요하다는 뜻이고, 그러한 과거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시장의 역사를 공부해야 합니다.

 

투자의 고수들이 경험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그러한 경험을 통해서만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습득된 데이터들이 우리의 뛰어난 뇌에 의해 통계적으로 분석되어 직관이라는 형태로 표출되기 때문입니다.

 

여담이지만 시장을 오래 겪은 사람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그 사람이 시장에서 돈을 크게 잃을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의 의견은 더 귀담아 들어야 한다는 증시 속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실수로부터 더 크게 배우는 법이며, 그러한 실수를 더 많이 저질러본 사람일 수록 더 훌륭한 직관을 얻게 되기 때문입니다.

 

만일 제시 리버모어가 말했듯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이고 시장의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는 것이라면 우리가 해야 할 가장 첫번째 과제는 시장의 역사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이는 간접적으로나마 우리에게 경험의 형태로 저장되어 미래에 더 나은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제가 시장의 역사에 대해 글을 쓰는 것에 대한 변론은 이 정도로 해두겠습니다. 더 길어지면 자칫 지루해질 소지가 있기 때문에..

 

1. 거래소의 설립

 

시장의 역사에 대해 글을 쓰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 과연 시간적인 순서에 따라 이야기할 것인가 아니면 흥미를 끄는 순서로 친숙한 주제부터 건드려 최종적으로는 모든 역사를 포괄할 수 있는 접근을 사용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적인 순서대로 기술을 하자면 우리나라의 경우 증권시장의 모태라고도 할 수 있는 19세기의 인천미두취인소(仁川米豆取引所)의 얘기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분명 이 시장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이 시장의 거래방식은 현물 거래가 아닌 선물 거래였으며 쪽바리들이 조선인들의 돈을 합법적으로 뺏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는 치욕의 역사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다 보면 너무나도 먼 과거의 얘기가 되어버리기에 일단 미루기로 하고 오늘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거래소의 설립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나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증권거래소가 설립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인 1956년 2월입니다. 증권거래소는 금융단, 증권단, 보험단이 각각 1억 환씩 출자하여 설립된 민간 법인이었지만 사실상 정부가 모든 것을 관리했습니다. 당시에 상장된 주식은 12개 종목이었고 채권은 국채 3종목이었습니다. 궁금해하실 분을 위해 12개의 상장 주식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대한증권거래소, 연합증권금융, 조흥은행, 저축은행, 한국상업은행, 흥업은행, 대한해운공사, 경성방직, 대한조선공사, 경성전기, 남선전기, 조선운수.

 

위의 종목들은 1956년 3월 3일 상장되었습니다. (본 자료는 한국증권거래소에서 발췌한 것임을 밝혀둡니다.)

 

비록 증권회사들이 점두 거래로 이루어지던 증권거래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거래소를 설립하였지만 초창기에는 이러한 목적이 달성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위에서 보시다시피 상장 주식수가 12개로 제한되어 있었고 그나마 대부분의 지분을 정부가 보유하고 있어 유통물량이 적었던 까닭입니다.

 

거래소 설립을 추진했던 것이 바로 증권사였다는 사실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활발한 증권 거래로 수익을 얻는 것은 증권사 뿐입니다. 동시에 증권사는 자기 스스로 투기의 장에 참여하기 위해 풍부한 유동성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거래소가 설립되기 이전 대한증권을 포함한 5개 증권사가 증권업협회를 설립했고, 1955년 1월에는 정부의 인가를 받아 '협회 증권매매 규약'을 제정했습니다.

 

금융가들이 정부와 결탁하여 대중의 돈을 빨아먹을 합법적인 방법을 찾아낸 것입니다. 즉, 카지노를 설립한 것이죠.

(초창기의 거래소가 정말 카지노였는지는 뒤이어 이어지는 역사로 분명해집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증권시장의 모태입니다.

애초부터 세력이 있었고, 그들은 증권거래를 조장해 수익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여담이지만 정부는 결국 힘 있는 자의 손을 들어주게 되어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정부는 단 한번도 진실로 약자의 손을 들어준 적이 없습니다. 민주주의의 토대가 약할 때는 힘으로 민중을 억압했고 민주주의의 씨앗이 조금 파종된 후부터는 표를 얻기 위해 민중을 이용했을 뿐입니다.

힘 있는 자는 언제나 정부를 이용해 자신이 합법적으로 어마어마한 이득을 챙길 수 있는 제도와 장치들을 마련해왔습니다. 안타까운 사실이지만 이렇게 해서 형성된 기득권은 여간해서는 무너지지 않는 법입니다. 그것이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입니다. 어쩔 수는 없지여.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자면 거래소가 설립된 초창기에 주식의 거래는 극히 제한적이었고 국채 거래대금이 전체 거래대금의 70% 이상을 차지했습니다. 이때의 거래는 현물 거래가 아닌 매매체결 1~2개월 후에 결제하는 선물 거래와 유사한 방식이었으며 결제 기간 내에서는 얼마든지 사고 팔 수 있었기에 투기가 조장될 씨앗을 잉태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시나 이러한 밑거름은 오늘날 국채파동이라고 일컫는 사태를 초래했습니다.

 

국채파동의 전모는 대강 이렇습니다.

1957년 9월, 180억 환에 이르는 제11회 국채발행 계획을 앞두고 정부는 153억 환 규모의 외환특별세법을 국회에 제출했습니다.

자, 생각해봅시다. 만일 이 법이 통과된다면 정부는 충분한 세금을 거둘 수 있게 될 것이고 그러면 굳이 180억 환에 달하는 국채를 발행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머리를 조금 더 굴려볼까여?

만일 세금이 충분히 걷혀서 국채를 발행하지 않게 되면 국채 공급량이 줄어들게 될 것이고 그 결과 국채 가격은 급등하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가능성을 간파한 증권사들이 과연 국채를 안 사들일까여? 당연히 사들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력의 본능적 행태입니다. 세력은 큰 수익의 가능성이 포착되면 거대한 자금을 동원하여 수익대상을 사들입니다.

 

실제로, 증권사들은 국채의 대량 매집에 나서게 됩니다. 물론 철두철미한 이들이 단순한 가능성만 보고 달려든 것은 아니고 국회 재정경제부 위원들로부터 국채를 발행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정보를 듣고 난 후 액숀을 취한 것이져.

 

결국 12월 국회는 제11회 국채발행을 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제10회 국채는 15환 정도에서 40환정도까지 3배 가까이 급등합니다. 증권사 세력들... 대박이 났습니다. 이제는 물량을 개투들에게 떠넘기기만 하면 될 뿐...

 

근데 예상 외로 정말로 재미있는 일이 일어납니다. 국채 가격이 급등하면서 과열 징후가 포착되자 정부는 갑자기 원래의 계획대로 제11회 국채발행을 통과시키고 대신 외환특별세법의 통과를 보류해버립니다. 미친 짓을 한 거죠.

 

그 결과는 말을 안해도 아시겠지여? 국채는 폭락세로 돌변합니다. 그러자 증권사 세력들은 어떻게 했을까여?

필사적으로 매수 방어에 나설 수 밖에 없었겠져. 매집한 금액이 너무도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손절매 같은 건 그들에게 있어서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ㅎ

 

그러면서 국채 매물의 압박과 증권사의 결사 매수 대응에 따라 시세는 올랐다 내렸다 난리를 치다가 1월 16일에는 거래대금이 20억 환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래서 급기야는 양쪽 다 증거금 부족 사태에 직면하게 되죠. 소위 말하는 마진 콜(MARGIN CALL)이 발생한 겁니다. 그러자 증권거래소는 긴급회의를 열어 17일 오전장을 일시 중단시키고 전날 거래분에 대해서는 일단 50%만 납부하도록 조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개 증권사는 결제를 이행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재무부 장관이 나서서 1월 16일 이뤄졌던 모든 매매를 취소하라는 명령을 내리지여. 정말 어이 없는 코미디입니다. 어쨌든 이를 통해 국채파동은 겨우 수습이 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 바로 국채파동의 전모입니다. 동시에 거래소가 설립된 후 자행되었던 최초의 주가 조작 사건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건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겠습니까?

세력이 정부와 결탁한다는 사실? 다 알고 있었던 얘기 아닙니까?

세력이 정보의 먹이 사슬의 위쪽에 존재한다는 사실? 그것도 새삼스러운 얘기죠.

정말로 중요한 것은 세력이 투기에 실패하면 시장이 교란된다는 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는 세력이 손실을 입도록 놔두지 못합니다.

 

이 경우 정부는 거래를 무효화하는 어이 없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오늘날은 다르냐구요? 아니죠. 최근 미국에서 망해야 마땅한 금융권에 천문학적 금액의 공적자금을 투입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져. 세력이 실패하면 시장은 야단이 납니다.

 

베어링 은행이 파산했을 때 세계 증시는 어떻게 반응했었져? LTCM이 러시아의 모라토리엄 선언으로 파산했을 때는? 최근 리먼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말씀 안 드려도 알겠지만 거대한 세력이 파산하는 경우가 발생하면 시장은 대환란을 겪습니다. 개투들이 이러한 대환란 속에서 피를 토하게 되는 것은 물론 말할 것도 없구여!

 

시장이 안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력이 돈을 벌어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시장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세력이 개투의 돈을 빨아먹는 구조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뜻이지여. 서글픈 현실이지만 정부는 시장의 안정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구조를 용인할 수 밖에 없는데 이것이 시장의 중요한 진실 중 한 가지입니다.

 

이야기를 계속해 나가자면 거래소가 카지노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1961년 말 증권가에는 거래소가 조만간 주식회사로 바뀔 것이라는 풍문이 돕니다. 이러한 풍문에 가만히 있을 우리의 증권사 세력들이 아닙니다. 이들은 당연히 거래소 주식을 대량 매집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세력의 본능적 행태라고 했져? 그들은 확실한 수익의 가능성 앞에서는 매우 공격적이 됩니다. 개투들이 상상할 수 있는 수준 이상으로...

 

1962년 4월, 증권거래법이 시행되면서 증권거래소는 주식회사로 탈바꿈합니다. 자, 이제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여?

 

굳이 물어볼 필요는 없겠지여. 전 국민이 가세합니다. 그들은 이 투기 열풍에 동참하여 시세를 37환까지 대략 3배 이상 폭등시켜 버립니다. 개투들은 거래소 주식이 너무 비싸지자 묻지마 투자로 다른 종목을 매수해대기 시작하고 결국 주가지수는 1월에서 5월 사이 40포인트에서 280포인트로 7배 상승합니다.

 

이런 국면에서 과열을 우려하여 공매도에 나섰던 증권사들은 모조리 쪽박을 찼습니다. 결국 그들은 사상 초유의 결제 불이행 사태에 빠지게 됩니다. ㅋㅋㅋ

 

이를 두고 증시 역사에서는 5월 파동이라고 부릅니다.

 

결국 정부는 또 어떻게 대응했을까여?

당연히 거래소는 휴장을 하고 증권사들은 정부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결제를 마칩니다.

이거야 원... 돈 잃으면 정부가 계속 메워주니...

 

어쨌거나 이 사건으로 거래소는 그 신뢰도가 크게 추락하게 됩니다. 결국 시장을 열 때마다 대규모 물량이 출회하면서 대폭락이 연출되자 정부는 급기야는 1963년 2월 25일 거래소의 무기한 휴장을 선언합니다.

 

5월 파동의 진실은 무엇일까여?

 

사실 5월 파동은 중앙정보부공화당 창당자금을 끌어오기 위해 증권계와 짜고 주가를 올린 사건으로 밝혀졌습니다.

 

그 이후에도 1964년에는 해동화재주 작전, 1970년에는 증권금융주 파동 등이 성행하면서 거래소 설립 후 10년 동안 온갖 투기와 작전으로 얼룩진 역사를 만들어냈습니다.

 

여러분.

거래소는 처음부터 카지노였습니다.

다만 초창기에는 정부가 카지노의 안정적인 운영에 미흡했고 세력들 또한 자주 파산하며 시장을 교란시켰습니다.

 

노인분들이 주식이라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러한 시대를 살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왜 이 시대에 그토록 투기가 창궐했는지에 대해 이유를 정리해보면

 

1) 시장 규모가 너무 작았다.

예를 들어 5월 파동의 주범이었던 윤응상씨는 작전의 베테랑으로 증시를 좌지우지했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몇 천만원의 자금으로도 시장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던 시절이니까여.

 

2) 증권사 수가 너무 많았다.

따라서 수수료 경쟁에 불이 붙어 그것만으로는 경영이 되지 않자 스스로 공격적인 투기를 감행했던 것입니다.

 

3) 레버리지를 이용한 선물 거래 방식이었다.

결국 과도한 레버리지 사용이 위에서도 보았던 여러번 결제 불이행 사태를 초래하며 시장을 마비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는 거래소 설립의 초창기 시절을 살펴보았습니다.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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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버블의 역사

 

증시 버블의 근원을 증시 수급에서만 찾으려고 하면 오류에 직면하게 됩니다.

2~4년을 주기로 반복되는(최근 들어서는 그 주기가 점차 짧아지고 있기는 하나) 버블의 발생과 붕괴의 근원은 산업의 재고 순환 사이클에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 큰 그림을 보도록 합니다. 우리 증시에서 나타난 역사적인 고점과 저점에 이름을 붙여보도록 하겠습니다.


첫 글에서 거래소 설립 후 투기로 얼룩진 역사를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조금 더 큰 안목으로 증시에서 반복된 버블 형성과 붕괴의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에서 보시다시피 버블과 침체는 몇 년을 주기로 반복되어 왔습니다.

 

전 이중에서 우선 IT 버블에 대한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하려고 합니다. IT 버블은 현재의 시장 참가자들 중의 상당수가 기억하고 있는 사건이고 우리 증시 역사상 단기간 유례 없는 대폭등을 보여줬던 시기이며 잉여 유동성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입니다. 또한 상승의 명분과 개념이 얼마나 중요할 수 있는지, 그리고 하나의 버블의 탄생에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도래가 동반되어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는 계기도 될 것입니다.

 

IT버블은 IMF 환란의 잿더미 속에서 불사조처럼 피어올랐습니다.

우선 IMF 참상이 일어났던 시기로 되돌아가보겠습니다. 참고로 이때는 제가 완전한 깡통을 차고 거지 신세가 되었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뒤이어 나타난 IT 버블은 저로 하여금 빚을 갚도록 해준 고마운 시기였으며 IT 버블의 정점에서 숏포지션으로 하락추세를 모조리 먹으며 추세추종의 엄청난 위력을 깨달았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제 투자인생을 돌이켜 보면 이때가 제1의 부 폭발 구간이라고 말해야 하겠습니다.

 

과연 무엇이 1998년 IMF가 초래한 황량한 묘지로부터 주가를 천정부지로 끌어올리게 했을까여?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번째는 급격한 초과 유동성의 팽창입니다.

초과 유동성 증가율은 통화유통량 증가율에서 실물경제활동 증가율을 감한 것이며 흔히 M2증가율에서 산업생산 증가율과 물가상승율을 감한 수치로 계산이 됩니다. 초과(잉여) 유동성이 팽창한다는 것은 실물 경기를 돌리는데 필요한 돈과 물가상승보다 더 많은 돈이 시중에 풀린다는 의미인데 이렇게 될 경우 앙드레 코스톨라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큰 대야의 물이 작은 대야로 흘러 넘치게 됩니다. (큰 대야는 전체 경제를 상징하고 작은 대야는 증권 시장을 상징합니다.)

 

실제로 1998년 정부는 경기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통화량을 크게 늘렸는데, 실물 경제는 극심한 침체 수준에 있었으므로 초과 유동성의 급격한 팽창이 일어났습니다. 갈곳 없이 떠도는 이러한 자금이 자본시장으로 향하게 되는 것은 세계 증시의 역사가 증명해줍니다.

 

두번째는 신경제(NEW ECONOMY)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생성이었습니다. 이미 이 당시 미국 경제는 완전 고용 속에서 인플레이션 없는 초호황을 구가하고 있었습니다. FRB는 거기에 더해 저금리 정책 기조를 유지하며 뮤추얼 펀드로의 자금 이동을 촉진시켰지여. 미국은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 2000년대까지 연평균 4%를 넘는 GDP 성장율을 보여줬습니다.

 

이러한 눈부신 경제성장은 기존의 경제학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필립스 곡선(PHILIPS CURVE)에 의하면 임금상승율(즉, 물가상승율)과 실업율 사이에는 역상관관계가 존재합니다.

<그림 :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발췌>

 

미국의 경우 통계적으로 실업률 5.5% 이하에서는 물가 상승 압력이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에는 실업율이 5% 이하로 떨어졌음에도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지 않는 기현상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저 인플레와 저 실업율을 동시에 달성할 수 없다는 기존의 견해와 그러한 견해에 기초하여 고인플레를 용인해왔던 경제정책과는 상반되는 현상이었기에 새로운 개념의 대두가 요구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경제학자들은 신경제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신경제론은 쉽게 말해 정보통신산업의 기술 혁신이 생산성 향상을 초래한다는 이론입니다. 일반적으로 기존 산업에서는 한계수확체감현상이 나타납니다. 즉, 생산단위를 추가할 때마다 한계수익은 감소하게 된다는 것이며 한계수익증가율이 0가 되면 더이상의 투자가 수익으로 이어지지 않는 상태에 이릅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임금증가가 비용증가를 수반해 실업율을 증가시키는 필립스 곡선이 나타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신경제에서는 한계수확체감과는 반대로 규모수익체증현상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특정한 상품을 추가 생산할 수록 한계 비용이 감소하는 것을 말합니다. 결국 생산량을 늘릴 수록 수익이 늘어나게 되는데 이는 IT산업의 중요힌 특징으로 지목되었습니다. 예를 들어 통신산업의 경우 어느 정도 인프라를 구축하게 되면 통신망의 추가적인 구축에 대한 비용은 감소하게 됩니다. 또한 컴퓨터 소프트웨어의 경우에도 처음 소프트웨어를 제작하는데는 엄청난 개발비가 들어가지만 일단 생산하고 나면 그러한 소프트웨어를 추가로 찍어내는데는 아주 근소한 비용만이 들어갑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임금상승율보다 생산성 증가율이 높아져서 인플레이션 없이도 실업율이 감소하는 호황이 가능하다는 주장이 신경제론의 골자라고 하겠습니다. 정보혁명은 기존의 모든 경제 이론의 틀을 깨버리는 결과로 이어졌고 이로써 장기 호황을 구가할 수 있게 되었다는 긍정론이 시장의 정서를 지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가가 상승하는데 필요한 두 가지는 심리입니다. 그리고 IMF가 휩쓸고 지나간 황량한 증시바닥에서 이 두 가지 조건이 갑자기 만족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추세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보여주는 차트 3개입니다.

각각 이 당시 폭등세를 보여주었던 SK텔레콤, KT, LG데이콤의 차트입니다.

 

<SK텔레콤>

<KT>

<LG데이콤>

여러분께서 주목하셔야 할 것은 기술적으로 보았을 때 상승의 1차 파동에서는 그 어떤 종목도 5개월 이동평균선을 깨고 내려간 적이 없다는 점입니다. 

20개월 이동평균선 위에서 제가 좋아하는 날아가는 S라인을 그려줬음은 물론이구여!

 

여러분. 추세추종이란 이런 종목을 물면 절대로 놓지 않는 불독 근성입니다. 그것 뿐입니다.

끝까지 함께 가는 겁니다. 그럴려면 배짱이 강해야 하겠지여.

그리고 기본적으로 추세라는 것이 얼마나 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역사적 지식이 있어야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러한 통신주의 상승이 IT버블의 전모였느냐구여? 천만의 말씀!

 

뉴욕 증시에서는 일찌감치 버블 논란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FRB의장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 조차 시장이 '비이성적 과열(IRRATIONAL EXUBERANCE)'에 처해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경고에도 불구하고 미 증시는 6,000포인트를 뚫고 1997년에는 7,000포인트, 1998년 말에는 9,000포인트를 차례차례 함락시키며 올라갔습니다. 급기야 1999년 3월 16일 미국 다우지수는 1만 포인트를 돌파했습니다.

 

이러한 상승이 엄청나다고 느끼신다면 아직 정말로 엄청난 상승이 무엇인지 모르는 겁니다. 1990년대 다우지수가 250% 정도 상승했다면 나스닥 지수는 1000% 상승했습니다. 바로 신경제론의 확산에 따른 IT.바이오.통신주들의 거침 없는 상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나스닥 지수 차트>

10년의 장기 상승 중에 20개월 이평선을 한번도 붕괴시키지 않았던 엄청난 저력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나스닥의 광풍은 전세계로 퍼져나가 글로벌 증시의 동반 폭등을 이끌어냈고 우리나라에서 또한 IT 버블을 양산해내었습니다.

정보 혁명과 뉴밀레니엄에 대한 기대감으로 TMT(Tech, Media, Telecom)주들이 강력한 테마를 형성하며 날아갔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신경제 주식이 이렇게 날아가는 동안 전통적인 산업에 해당하는 POSCO, 현대차, 국민은행(현재의 KB금융) 등의 구경제 주식은 상대적으로 소외되었습니다. 겨우 4~5배의 상승만을 보여줬을 따름이었습니다.

 

이러한 주가 차별화 장세 속에서 코스닥 잡주들은 그야말로 미친 망아지마냥 날뛰었습니다.

1998년 저점 600포인트 근방을 기준으로 2000년 고점 2925포인트까지 무려 5배가 상승했습니다.

 

코스닥이 이렇게 날라갈 수 있었던 데는 IMF 이후의 시대적 분위기가 중요한 몫을 담당했습니다.

정부는 IMF를 초래한 재벌중심의 경제구조를 바꾸기 위해 적극적인 벤처기업 육성을 시도했습니다. 벤처기업이 주식시장에 상장되기 위한 등록요건이 완화되었으며 상장시키기만 하면 대주주는 대박을 터뜨릴 수 있었지여.

'자고 나면 상한가'라는 말이 나돌았던 것이 기억납니다.

 

IT 버블 얘기가 나오면 이 당시의 스타주 하나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지여.

 

여러분. 새롬기술이라고 기억하시나여? 현재는 솔본으로 이름이 바뀌었져.

긴말은 필요 없고 아래 차트를 감상하고 넘어가시면 될 듯 합니다.

최악의 비관적인 상황 속에서 미국의 나스닥 광풍과 국내 정책적 방향, 그리고 10조원을 돌파한 고객 예탁금과 40조원 이상 증가한 주식형 펀드 잔고 등의 유동성 팽창으로 증시는 그야말로 뻥!하고 폭발했던 것입니다.

 

물론...

 

버블의 말로는 어떠한지 여러분은 이제 모두 아실 것입니다.

2000년 나스닥이 대천정을 치고 폭락세로 접어들자 우리 시장 또한 예외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광란의 축제는 끝이 났고 수많은 사람들이 증시 폭락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피눈물을 토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대축제 뒤에도 역시나 세력이 도사리고 있었으니...

극히 일부가 밝혀진 바에 불과하겠지만 정현준 게이트, 이용호 게이트, 진승현 게이트 등이 잇따라 드러나면서 온갖 종류의 금융 사기와 비리, 그리고 주가조작이 이 기간 동안 존재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뉴스는 개투들의 가슴에 시커먼 멍을 남기고 말았지여...

 

마지막으로 이 기간 동안 나타난 버블을 객관적으로 분석해서 무엇인가 배울 점은 없는지 정리해보기로 합니다.

 

첫번째, 시세가 바닥에서 탈출하기 위해서는 초과 유동성 팽창이 일어나야만 한다.

즉, 시중에 돈이 널리 풀려 있어야 하는데 이는 한은의 공개시장 조작, 금리 인하 등의 금융 정책을 통해 달성이 됩니다. 주가가 폭락하고 경기가 불황에 치달으면 언제나 이러한 조치가 취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해서 팽창되는 유동성은 조만간 자본시장으로 한번쯤은 치고 들어갑니다. 미국 증시 격언에 'FRB에 맞서지 마라'라는 격언도 있지여?

 

두번째, 유동성 장세가 말 그대로 유동성 버블로 끝나지 않으려면 경기가 바닥을 형성했다는 공감대가 형성이 되어야 한다.

펀더멘털이 개선되거나 적어도 악화되는 속도가 둔화된다는 증거가 없다면 증시는 장기 상승을 이어갈 수가 없습니다.

 

세번째, 대중의 기대감을 자극할 수 있는, 기존의 패러다임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도래해야 합니다. IT버블을 이끌었던 학계의 신경제이론과 같이 주가 상승을 장기간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적인 구실이 필요한 법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대의명분이 존재해야 한다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투자자들도 바보는 아니기 때문에 장기 상승의 근저에 합리적인 토대가 존재하지 않으면 따라가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신(新) 패러다임에 발맞추어 적극적인 정부 주도의 정책이 나와주어야 합니다. 이러한 정책적 기조가 유지되지 않으면 세력들은 시세를 만들지 않으며 추세적 상승은 나타나기 힘이 듭니다.

 

이러한 교훈들을 현재 상황에 적용해볼 수 있을까여?

 

현재 유동성이 급격하게 팽창되어 있는 상황은 맞습니다.

미국에서 발표되는 각종 경제지표들이 경기의 호전을 점치고 있으며 혹자는 올해 말에는 경기 회복이 나타날 수도 있다고 말합니다.

물론 저는 아직 이에 대해 조금 조심스럽습니다.

그 다음으로 부동산 버블의 붕괴로 대폭락장을 경험한 투자자를 달래고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과 정책 기조가 나타나야 새로운 버블이 생겨날 것입니다.

그게 과연 무엇일까여?

 

사실 작년 말부터 여기에 대한 힌트는 조금씩 시중으로 풀려나오고 있었습니다.

최근의 금융위기는 범세계적인 금융위기이니만큼 여기서 헤어나오기 위해서는 특정한 국가나 문화만을 자극하는 패러다임이 아닌 범세계적 수요를 만족할 수 있는 신성장 산업의 발굴과 이와 보폭을 맞추는 글로벌한 정책적 공조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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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의 글에서도 살펴보았듯 주기적으로 터지는 버블은 언제나 개인들에게 신분상승의 기회를 던져줍니다.

다만 버블 형성과 붕괴의 역사를 자세히 알지 못하는 개인들만이 바닥을 예단하고 진입했다가 지리한 박스권에 지쳐서 떠난 후 상승세를 놓치고, 상승세를 부정하다가 불꽃장세를 연출하기 시작했을 때에야 참지 못하고 달려들어 꼭지에서 물립니다.

 

저는 주가에 어떠한 절대적인 법칙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부정하는 입장입니다.

시리즈물의 첫글에서 말씀드렸듯 증시는 통계적으로 접근해야 하는 대상이기에 모든 것은 '~ 가능성이 높다' 혹은 '~ 가능성이 낮다'라는 방식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이는 모든 사회과학의 대상에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단지 많은 개투들이 이분법적 사고를 버리지 못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어서 통계적 사고의 모호함을 견디지 못하는 경향이 있을 뿐입니다.

 

저는 통계적으로 유의미하다고 여기는 몇 가지 결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중 두 가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주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상하는 것보다 더 높이 올라가고 또한 더 깊이 떨어진다.

2) 주가가 천정에 머무르는 기간은 짧으나 바닥에서 횡보하는 기간은 길다.

 

이 두 가지 사실을 도출해낸 자료는 다름 아닌 우리 시장의 역사 그 자체입니다.

 

이번 글에서는 조금 더 다이내믹함을 더하기 위해 당시 제가 매매했던 내역을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해보겠습니다.

 

3. 9.11 테러와 내수 호황

 

IT 버블의 붕괴 과정에서 숏 포지션으로 계속 따라가던 저는 2000년 말 500포인트 근방에서 긴 아래꼬리를 가진 양봉이 반복해서 출현하며 바닥의 징후를 나타내자 마침내 선물 매도 포지션을 청산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제 스스로에게 휴식의 기간을 선물하고 바닥권의 매집기간을 관찰하며 매매를 쉬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때 저는 동료 두 명과 싱가포르로 여행을 떠나 두리안이라는 신기한 과일도 먹어보고 망고와 파파야도 진저리나게 먹었습니다. 싱가포르는 참으로 깨끗한 도시였습니다. 우리는 호텔방에 장기투숙을 하면서 시내 관광을 다니고 다양한 나라 음식을 잔뜩 먹고 다녔지여. 이때 아마 체중이 5킬로 가량 쪄서 후에 다시 다이어트를 하느라 진땀을 뺐었습니다.

 

여행을 다녀온 후 저는 스승님의 권고대로 경제 공부를 하고 증권사를 다니며 인맥을 쌓고 동료 트레이더를 만나 술자리를 하는 등 몇 개월 간의 휴식기간을 가졌습니다.

 

스승님이 매매를 하고 싶어하는 저에게 일침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먹을 것만 먹어라. 바닥은 길 것이다. 충분히 먹은 후에 먹지 못할 것까지 탐하다가는 제 욕심에 제가 넘어가는 법이다.'

 

그럼에도 경험이 아직 부족했던 저는 매일의 무료한 생활을 견디지 못해 결국 몇 개월만에 다시 선물 매매에 손을 댔지만 10번 연속 손절매라는 최악의 오명을 매매일지에 남기고 2000만원 가량을 날린 후 더 쉬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저는 스승님의 현명함에 혀를 내둘렀답니다.

 

천정은 짧고 바닥은 길다라는 격언의 의미를 이때 확실히 깨달았던 듯 싶습니다. 바닥은 1년 가까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그러고는 이윽고 그날이 찾아왔습니다. 2001년 9월 11일.

전 그날 트레이더 동생 한 명과 삼성동 고기집에서 쏘주 한병을 까고 있었습니다. 지리한 박스권 야그를 하며 요즘 장세가 너무 지루하다... 이런 야그를 하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이러니하죠. 갑자기 식당 안이 술렁이기 시작하더니 TV 채널이 바뀌고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생중계되었습니다.

 

동생은 그 당시 풋옵숀을 오바하여 홀딩하고 있었습니다. 홀딩 이유인즉, 5이평선이 20이평선 아래에서 역S자형 패턴을 보이고 있었고 11일 당일 파란 음봉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그 동생은 풋옵숀에서 대박이 날 것이 분명했지만 세계의 유래없는 대참사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를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했지여.

 

그리고 그 다음날 거래소는 개장 시간을 세 시간 늦추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은 개장하자마자 9% 이상 하락하며 출발하여 10%에 도달하자 서킷 브레이커가 발동되었고 그러고도 이어진 추가하락은 종가를 -12.02%에 맞춰놓고 말았습니다.

 

풋을 가지고 있었던 동생은 말 그대로 벼락 대박을 맞았지여. 그러나 결코 웃으며 기뻐 날뛸 수 만은 없었던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습니다.

 

미국 증시는 9.11 여파로 나흘간 휴장을 했습니다. 그리고 9월 17일 뉴욕 증시의 개장 직전 FRB는 연방기금 금리를 3.50%에서 3.00%로 인하하였습니다. 그래서인지 이날 다우지수는 7% 가량 하락하며 마쳤지만 테러 여파로 소비가 얼어붙을 것이란 전망과 미국의 보복 가능성 등으로 다음날부터 주가가 추가하락하여 주간 기준으로는 사상 최대의 하락율인 -14.3%를 기록했습니다.

 

시장을 관찰하던 저는 오랜 휴식기간을 뒤로 하고 다시 시장으로 진입할 타이밍을 잡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제가 상당히 신뢰하는 지표인 베어 트랩(BEAR TRAP)의 발생이었습니다.

 

저는 9.11 테러 이후에 곧바로 선물 매도로 진입하지는 않았는데 그 이유는 돌발 악재는 도리어 매수의 기회가 되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기 때문입 니다. 물론 그 당시 동료 트레이더와 함께 9.11 테러가 과연 돌발 악재인가에 대해 활발히 의견 교환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어쨌든 바닥을 예단할 수 없는 상황에서 곧바로 매수에 가담할 수도 없었기에 그저 시장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세가 베어 트랩을 만들었을 때에는 주저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시세는 더 하락하지 않을 가능성이 컸습니다. 그래서 저는 선물 매수 포지션으로 진입을 했습니다.



제 전략은 박스권 하단의 베어 트랩에서 진입을 했으니

1) 20일선을 붕괴하거나

2) 박스권 상단에 도달하면

포지션 청산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세는 순조롭게 올라 박스권 상단에 도달했고 저는 일단 수익 보전의 차원에서 박스권 도달 후 첫 음봉에서 포지션을 청산했습니다.

 

그러나 시세는 강했습니다. 곧 박스권 상단을 돌파해 올라갔고 저는 추격매수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조바심이 생겼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 원칙에 충실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저항선을 돌파했으니 이제 지지선으로 변한 저항선으로의 되돌림이 한번은 발생할 것이다.

만일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매수포지션으로 재진입할 것이다.

 

신기하게도 제 생각은 그대로 들어맞았고 시세는 되돌림 후 지지받고 다시 상승하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지지선에서 반등 후 첫 양봉에서 선물 매수 진입을 하였고 20일선을 붕괴할 때까지 포지션을 보유하기로 전략을 짰습니다.

시세는 정확히 20일선의 강력한 지지를 받으며 올라갔습니다.

 

사실 이 구간에서 포지션을 보유하기가 심리적으로 매우 괴로웠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누렇게 색이 바랜 제 매매일지에는 그 당시 미국 증시가 1월과 3월에 다소 큰 조정을 받으며 하락전환하는 모습이 나타났다고 적혀 있는데, 이상하게도 우리 증시는 상승 랠리를 계속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미증시와의 디커플링을 설명하기 위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되며 코리아 리레이팅(KOREA RE-RATING)이 일어나고 있다는 설이 나돌았습니다. 저는 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얘기였으나 여하튼 청산 신호가 나오지 않았으니 불안한 마음을 옥죄며 끝까지 배짱을 튕겼던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당시의 상황을 살펴보면 기업의 실적 개선이 뚜렷하게 나타났습니다. IMF의 고통 속에서 처절한 구조조정을 마치고 난 우리 기업들은 개선된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뚜렷한 수익성 호전 및 재무안정성의 증가를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한편 9.11 테러 이후 정부는 유동성 확충을 위해 네 차례나 금리 인하를 단행하였고 재정을 조기 집행하며 건설경기 부양에 힘썼습니다.

 

이전 글에서 말씀드린 모든 조건이 만족되었지여?

1) 유동성 팽창

2) 정부 주도의 경기 부양

3) 펀더멘털의 뚜렷한 개선

4) 코리아 리레이팅이라는 대의명분의 부상

 

바로 이때 현재 장세와 아주 유사한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IT버블의 초호황을 경험한 후 고점에서 물려 있던 개투들이 앵그리 머니(ANGRY MONEY)를 증시에 투입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초특급 버블이 해소된 후 다시 상승이 올때 대개 개투들의 복수심이 극에 달해 공격적인 시세를 내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후끈 달아오른 우리 증시는 미 증시가 베어마켓 랠리(BEAR MARKET RALLY)를 끝마치고 하락하는 와중에도 900포인트를 돌파하며 올라갔습니다.

 

그러자 이때 애널들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져? ㅋㅋ

주가지수 1000포인트 돌파설이 만연했고 심지어는 1500포인트까지 간다는 얘기도 나돌았습니다.

 

9.11 테러 이후 3조원 이상 주식을 순매수하면서 증시 상승을 주도했던 외국인은 주가가 800포인트를 돌파하는 시점부터 순매도 기조로 돌아섰습니다. 물론 주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승행진을 이어갔지만 외국인들은 이미 우리의 내수시장이 과열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던 것으로 저는 봅니다.  

 

어쨌든 저는 제 원칙대로 시세가 20일선을 하향돌파한 시점에 매수포지션을 전량 청산하고 관찰 모드로 들어갔습니다.

그러자 재미있는 패턴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확대 삼각형 패턴이 등장한 것이지여.

스승님이 저에게 한 말씀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지금 나타나는 패턴을 잊지 말아라.'

 

확대 삼각형 이후 20일선 밑에서 나타난 5일선의 쌍봉에서 저는 매도 포지션으로 진입했습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하락추세가 진행된다는 전제 하에 20일선을 기준으로 매도진입과 청산을 반복했습니다.

다시 한번 추세추종의 강력함과 단순함에 스스로 감탄하며 조금씩 쌓이는 계좌 금액을 보며 흐뭇해 했던 것 같습니다.




2002년은 참으로 다사다난한 해였습니다.

6월 월드컵의 개최. 전국민이 붉은 악마로 한 마음이 되어 도로를 점령하고 월드컵 4강 진출에 열광했던 그 때.

누구라도 잊기 힘든 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광란 속에서 발표되는 경제 지표들은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기 시작했습니다.

내수 호황을 이끌었던 소비 버블이 꺼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민간소비 증가율이 상반기의 7%에서 3분기에 6%, 4분기에 5%가 되었고, 2분기의 총저축율은 27.5%로 주저앉았는데 이는 20년 만의 최저 수준인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가계 부채는 순부채 -12조 5,000억원으로 집계되었는데 이는 불과 1년 전 27조원으로부터 35조원 이상이 감소한 것입니다. 그만큼 전국민이 흥청망청 소비에 열중했다는 뜻입니다. 또한 정부가 경기를 부양하기 위해 주택 담보 대출을 완화시켰던 것이 급격한 주택 담보 대출의 증가를 불러왔습니다.

 

신용카드업이 초호황을 누리면서 신용카드 사용액이 2002년 상반기에 300조원을 넘어섰습니다. 카드는 학생과 무직자들에게까지 무분별하게 발급되었고 그 결과 연체율이 크게 증가하여 카드사가 경영위기에 빠지자 정부는 현금서비스 비중을 50%로 낮추도록 했습니다. 그러자 카드 돌려막기로 겨우 버티고 있던 개인들이 파산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카드사들이 대규모 적자로 돌아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시기에 신용불량이 되었으며 그 결과 소비가 더욱 위축되는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었습니다. 한때 소비 버블로 초호황을 누렸던 내수경기는 곤두박질치기 시작했고 위의 차트에서 보시는 바와 같이 주가 또한 상승분을 모조리 반납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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